본문 바로가기
이것저것

지독한 자기 혐오자였던 미키, 그리고 나

by sungkee 2025. 3. 26.
반응형

미키는 평생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 미키는 엑스펜더블에 지원할 때 계약서를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자신을 이용하는 티모를 친구라 감싸기도 하고, 자신에게 음식 테스트를 한 마샬에게는 식사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됐을까? 어릴 적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내면에 뿌리 깊은 자기 혐오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아원에서 자라며 아무도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계속 죽어야하는 상황조차도 그는 자신을 탓하며 벌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혐오로 자기 합리화를 오지게 한다.

 

이렇게 지독한 자기혐오자였던 미키에게서 어떻게 미키18이 나오게 된 걸까? 처음엔 이 설정이 조금은 억지스럽다 생각했다. 17번의 죽음 동안 한결같았던 미키가 갑자기 180도 돌변하다니. 그런데 나를 돌아보며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미키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나 또한 습관적으로 자기 비난을 쉽게 했다. 잘 한 것보다는 잘 못한 것, 부족한 점에 집중하고 이를 고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다 작년 6월 갑자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결국 모든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거의 반년을 하루 종일 핸드폰, 넷플릭스, 게임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러나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하고부터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기 비난이 심하고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세우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내게 채찍질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몰아세우다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상담 받을 때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 '어떤 말을 듣고 싶냐'는 질문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해오던 말은 항상 "너는 XX가 부족해. 그러려면 XX를 개선해야 해, 넌 왜 이렇게 금방 포기하니" 등등이었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은 내가 맨날 하는 말 말고, 진심으로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직접 말해보라고 하셨다. 정말 말문이 턱턱 막힌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그렇게 조용히 생각하다가 꺼낸 말은 "넌 그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야. 너무 뭘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였다.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그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부모에게 한 번도 듣지 못했고, 나 스스로에게도 해준 적 없는 말이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눈 뜬 순간이었다.

 

미키18은 17과 몹시 달라보이지만 사실 그도 자기 혐오의 면모가 진하게 보인다. 미키 18은 17을 죽이려고 했으며 17의 찐따같은 성격에 몹시 화를 낸다. 이런 면에서 역시 그 또한 미키라는 것이 증명된다. 자기 혐오를 미키17 제거라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일 뿐. 그러나 17과 다른 점은 어릴 적 사고가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키는 아마 원래부터 그 사고가 자기 때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불행이 닥칠 때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탓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이를 모두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미키도 나처럼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을 것이고, 스스로도 몰랐던 내면의 자아가 미키18로 발현된 것이다. "어릴 적 자동차 사고는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소모품이 아닌 소중한 인간이야. 너를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나쁜 거야."라고.

 

미키18이 죽으면서 이 영화의 메시지는 더 명확해진다. 자기 혐오가 너무 심해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18은 결국 17이라는 본래의 자신을 남기며 떠난다. 18은 마지막에 17을 인정한 것이다. 덜 떨어지고 순진한 나의 모습, 그치만 그 모습 마저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터뜨렸다. 자기 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인정이라는 것. 나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처럼 불만족스런 부분에 더 집중했던 경우엔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미키처럼 리프린트 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죽기 전에 내 안의 미키18을 일깨우고 미키17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난 그 과정 속에 있는 듯 하다. 오늘 못 한 것보다 사소하더라도 나를 위해 한 일을 생각하는 것. 포기했던 것보다 끝까지 해냈던 일을 칭찬하는 것. 그리고 어떤 날은 아무 것도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것. 존재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 이렇게 하루하루 자기 비난의 관성을 끊어 내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짧은 생각]

 

친구 티모는 미키가 익스펜더블이 되기 전부터 그를 도구로 사용했다. 마카롱 가게를 같이 하자며 회유하면서 사채는 미키의 명의로 빌린다. 결국 우주선에서도 너는 어차피 리프린트 되지 않냐며 끝까지 그를 이용하려고만 한다. 티모가 극적으로 그려져서 그렇지 사실은 나샤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의 미키를 대하는 방식은 티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동료 카이라는 인물은 마샬과의 식사 자리에서 미키를 지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녀도 마샬이 명령이라며 강압적으로 나오자 결국 권력에 굴복하며, 이후엔 여자친구를 잃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대체재로써 미키를 가지려 한다. 우주선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목소리를 내지만 결국 그 체제에 녹아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불만이 많고 이를 나름 표출하지만 절대 맞서 싸우지는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우리들이 카이를 닮지 않았을까 싶다.

 

연구원인 도로시는 짧은 시간에 외계 생물의 통역기를 만들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그녀는 처음 미키가 프린트 될 때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며 크리퍼를 그저 처리해야 할 괴물이 아닌 인간과 동등한 생물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녀도 연구원이라는 직업과 환경으로 인해 미키의 고통에 무감한 모습을 보인다. 이번 삶은 15분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순진하고 덜 떨어진 원본 미키 때부터 나샤는 그를 사랑했다. 미키의 멀티플 상황에서도 나샤는 순한 맛과 매운 맛이라며 두 모습을 모두 사랑한다. 촉망받는 엘리트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미키를 구하기 위해 함께 싸우고 감옥까지 가게 된다. 미키 자신조차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우주선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미키를 소모품이 아닌 인간이란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한다. 곁에 이런 사람 한 명만 있더라도 엄청난 행운이다. 

반응형

'이것저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가 폭력의 비극, 제주 4.3사건을 돌아보다  (0) 2025.03.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