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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국가 폭력의 비극, 제주 4.3사건을 돌아보다

by sungkee 202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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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물러나자 미군이 들어왔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우리나라는 갑작스런 해방을 맞이했다. 1910년 강제 한일합병 조약 이후로 35년 간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조선인에게 해방의 기쁨은 고작 한 달도 가지 못했다. 그 해 9월 7일, 미군정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서울 조선총독부에 일장기가 미군의 성조기로 교체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은 조선땅을 반으로 갈라 자기들끼리 신탁 통치를 구상하고 있었고, 결국 미군이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occupy)'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통일 독립 국가'를 소망했던 당시 조선인은 신탁 통치가 또다른 식민이며, 국토의 분단을 야기한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6명을 쏴 죽였다.

1947년, 3.1절을 맞이하여 전국에서는 "통일독립 전취"을 주창하며 기념식에서 시위를 열었다. 그러나 이 날 제주에서는 4.3사건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을 관람하던 어린 아이가 감시감독하던 경찰의 말에 치여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해당 경찰은 그대로 지나갔고 구경꾼들이 사과하라며 돌을 던지면서 따라갔다. 이를 보고 폭동으로 오해한 다른 경찰들이 그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이 사건으로 무고한 제주도민 6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시위 주동자를 잡으려 했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민,관 할 것 없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3.1시위

 

 

 


 

 

탄압에 저항하고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한다.

미군정은 좌익의 남로당이 제주도민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라 낙인 찍고, 한국인 경찰을 내세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14일부터 1948년 4.3사건 직전까지 2,500명의 제주도민이 검속됐다. 또한 고문치사 및 총살로 3명이 사망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한편,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으로 인해 UN은 '한반도 가능지역 내의 선거 실시', 즉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했다. 통일 독립 국가를 소망했던 조선인에게 이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하고 5.10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의 350명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무장단체는 제주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이에 미군정은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대신 무장봉기 지도자와 평화 협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일, 오라리 마을에 갑자기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40년 뒤 이 사건은 우익단체의 소행임이 밝혀졌으나, 당시 미군정은 좌익 폭도의 짓이라 생각했다. 아마 미군정은 알았으나 이를 모른 체 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미군정은 "무장대를 총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산속으로 피난한 제주도민들

 

미군정의 탄압과 좌우익 간 갈등 속에서 제주도민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많은 도민들은 혼란을 피해 산 속으로 피신했고, 결국 5월 10일 선거에서 전국 유일하게 제주도만 투표 거부로 선거 무효 처리가 됐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미군정은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작전을 지시한 브라운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우리 마을은 제삿날이 모두 같아. 

브라운 대령의 무참별 검거 작전에도 불구하고 6월 23일에 실시된 재선거 또한 실패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군 사령관들은 한국 정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는 제주에 분개했으며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했다고 한다. 

 

2001년 10월 24일자 <뉴욕타임스> 4.3 특집기사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는 제주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주한 미군도 제주도 상황이 빨리 정리되길 바랐다. 미국은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고,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 하기 위해 제주도 사태를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1948년 10월 20일부터 정부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초토화작전'을 감행했다. 군은 비무장 민간인을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집단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제주 북촌리는 모든 집안의 제삿날이 같다고 한다. 400명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 군에 의해 총살 당했기 때문이다. 학살을 피해 겨우 생존하더라도 산 속으로 피난간 사람들은 한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경찰에 잡히면 사형 당하거나 형무소로 끌려가야 했다.

 

대전형무소 수형자들이 집단으로 처형된 '골령골의 학살' 유해

 

1950년 6.25 전쟁 직후 정부는 육지 형무소에 수감된 4.3 수형자들 약 3천 여 명을 불법으로 처형했다. 북한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상황이라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주 청년들은 자원입대하여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빨갱이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민은 고향과 전쟁터 모두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학살의 끝, 그러나 상처는 지속된다.

7년 간의 탄압 끝에 경찰은 1954년 9월 21일 공식적으로 4.3 사건을 종료했다. 2018년까지 희생자 및 유족 신고 수는 거의 1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제주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데 이에 따르면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제주의 어떠한 가정도 학살의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학살은 끝났지만 마음의 상처와 후유증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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